생애 및 업적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자 무장, 김종서 장군의 생애와 위대한 업적

김종서 장군 초상화

김종서 金宗瑞

절재(節齋)

1383년 (고려 우왕 9년) - 1453년 (계유정란)

문무겸전의 명재상

출생과 관직 생활

태종 5년(1405년) 과거에 급제하여 문신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나, 조선 초 무신이라 불리며 문무를 고루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습니다.

태종부터 단종까지 4대에 걸쳐 좌의정 등 고위관직을 지내며 조선 초기 종묘사직을 지킴에 충의를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양대군(세조)에게 계유정란 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으며, 그로 인해 장군에 대한 사료는 거의 소실된 상태입니다.

6진 개척의 위업

세종 15년, 김종서 장군은 6진을 개척하여 현 대한민국의 북방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까지 국토를 확장시킨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며 대동강과 원산을 잇는 경계선까지 국토를 확장했지만, 나당연합의 댓가로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당나라에게 내주게 되었으나, 김종서 장군은 그 중 압록강 두만강 유역까지의 땅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조선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삶의 터전을 넓힌 역사적 위업이었습니다.

호기가(豪氣歌)

국경 성곽에 긴 칼 짚고 서서 지으신 《호기가》는 장군의 호방한 기백과 의지를 잘 나타낸 대표적인 시조입니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짊고 서서

긴 파람 흰 한소래에

거칠 것이 없에라

- 절재 김종서

이 시조는 북방 국경을 지키는 장군의 굳센 의지와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삭풍과 명월, 만리변성의 이미지는 장군의 불굴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신원 복권과 재조명

영조 22년

장군은 사후 약 300년이 지난 영조 22년이 되어서야 신원 복관의 교지를 받고 복권되었으며, 충절의 상징으로 재조명되었습니다.

순조 시대

순조 때에는 장군의 충과 그의 장자 승규의 효를 기리는 정려각을 하사받았습니다.

역사는 결국 진실을 밝혀냅니다. 김종서 장군의 충절과 업적은 300년의 시간을 거쳐 다시 빛을 보게 되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평가

"김종서 장군은 조선 초기를 통틀어 진정한 충을 보여주신 분으로, 문무를 겸비한 탁월한 군사 전략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6진 개척은 조선 영토의 확장뿐 아니라, 국방의 기틀을 마련한 불멸의 업적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주요 연표

1383년
고려 우왕 9년, 강원도 회양에서 출생
1405년
태종 5년, 과거 급제
1433년
세종 15년, 6진 개척 완료
1453년
계유정란으로 순절
1746년
영조 22년, 신원 복권